Chapter 77
1.
“허.”
탄성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내 손에는 여전히 와카모가 전달해준 자료 뭉치가 들려있는 채였다.
하지만 여기서 강조할 점은 난 자료의 내용을 보고 탄성을 흘린 것이 아니라- 물론 충격적인 내용이긴 했지만, 내가 주목한 점은 그게 아니었다.
이 정도 수준의 자료를 와카모와 히마리 두 사람을 풀어놓은 것만으로 손에 넣었다는 사실.
그게 중요했다.
와카모가 전해준 정보- 혹시 모를 변수에 대비해 히마리와 함께 와카모를 아비도스 현장에서 배제시킨 결과가 바로 이 자료들이었다.
물론, 지극히 빙의자스러운, 주역이 아닌 인물들의 등장을 조금이라도 줄이겠다는 심정으로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실제로 카이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직 수배자 신세인 와카모를 굳이 이 시점에 세간에 드러낼 필요도 없다 생각했기에.
또한, 이미 틀어질대로 틀어진 상황에서 내가 진짜로 ‘잘못된다면’ 그것을 수습해줄 인물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했기에, 천재 미소녀와 와카모라는 강자를 붙여서 대응할 수 있도록 팀을 꾸며놓은 것.
그 결과가 카이저의 음모를 미리 알아채게 되는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결론은 이거다.
카이저의 음모를 알았다곤 해도 내 목표가 변할 일도, 뭔가 큰 충격을 받지도 않았다는 것.
언젠가는 충돌하게 될 녀석들이 다른 마음을 품었다고 한들, 내가 해야할 일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그래서 신경끄고 현재를 즐기기로 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휴식이기도 했고, 그간 쉼없이 달려오며 조금 지치기도 했었으니까.
그런데…….
“심심해.”
막상 쉬고 있으니 뭘 해야할지 모르겠다.
여유가 생기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라곤 단련과 새로운 히어로 장비의 구상안 이런 것 뿐이더라.
무작정 쉬겠다고 침대에 누워봐도 잠에는 들지않고 무엇보다 히나 냄새가 풍겨와서 더 쉴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의미는 아니었다.
사람 냄새가 나니 외로움이 느껴진다고 해야하나.
전생에는 이러지 않았던거 같은데.
이것도 TS당한 영향인걸까. 묘하게 이성과 감성의 영역이 서로 맞물리지 않은 듯한 불균형이 느껴진다.
당장 사람들이라도 만나서 외로움을 달래고 싶달까.
‘…….’
쓰읍. 왜 평소에는 눈치채지 못했을까.
생각해보니 평소에도 혼자 시간을 보내던 때는 단련하거나 공부하던 시간이 전부였다. 그 외에는 맨날 히마리 선배를 비롯한 사람이나 만나고 다녔었지.
전생에는 오히려 사람을 싫어하면 싫어했었다.
더군다나 온갖 사건에 휘말리면서 이런 사소한 변화를 눈치챌 겨를도 없었고 말이다.
아무래도… 이번 기회를 통해 나 자신에게 일어난 사소한 변화들도 점검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휴식을 마음껏 누리면서 말이다.
“으음. 근데 뭐하지.”
전생의 나는 이럴 때 뭐를 하며 시간을 보냈더라.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보았다.
…….
시발. 쉰 적이 없었구나.
어떻게든 혼자 살아남겠다고 공부하고, 알바하고, 운동하고, 틈나는 시간에 독서를 하거나 했었다.
나를 책임져 줄 사람이 없으니 악착같이 노력하는 성실함이라도 있어야겠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기억을 더 뒤져보니 전생에서 내가 유일하게 ‘취미’라고 부를만한 것을 했던게 몇 년 전에 알게 되었던 모바일 게임, ‘블루 아카이브’였다.
근데 지금은 블루 아카이브가 세상에 없다.
그럼 나는 무엇을 하며 지내야하지?
“……모르겠는데?”
이미 상처도 다 나았고, 컨디션도 나쁘지않고, 지금 당장이라도 히어로 활동을 시작해도 될 정도로 몸 상태가 너무나도 좋았다.
오히려 마음 속 한켠에서 성장한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 정도로.
‘……그래도 그건 좀.’
휴식은 휴식이고, 단련은 단련이지.
이 순간만큼은 완벽하게 쉬고 싶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귀찮기도 하고.
“쓰읍. 뭐하지.”
진짜로 고민된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어서 더 당황스럽다. 차라리 누구한테 물어보고 싶을 정도-
“어?”
…….
누구한테, 물어본다……?
“오.”
그 방법이 있었네.
게헨나에 딱 알맞은 인재가 있었지.
2.
“실크는 어디있지, 이로하!”
“하아, 마코토 선배. 저도 모른다니까요…….”
“실크의 능력은 압도적… 반드시 우리가 손에 넣어야하는 인재다! 히나에게는 절대로 빼앗겨선 안된다! 그러니 어서 실크의 행방을 찾아라! 포획 작전은 이 몸이 짜도록 하지!”
“아아. 귀찮아, 정말…….”
“키키킥. 실크를 확실히 포획하려면…….”
오늘도 어김없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상대- 게헨나 학원의 학생회장인 ‘하누마 마코토’의 말에 소녀는 귓가를 손으로 틀어막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대체 어디서 저런 정보를 입수한건지. 자신이랑 연결점이라곤 일절 없으면서 며칠 전부터 실크, 실크 시끄럽게 구는건지 모르겠다.
‘애초에 붙잡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자신의 업무는 내팽개치고 또 바보같은 행동을 시작했구나, 하고 소녀- ‘나츠메 이로하’는 속으로 한탄을 내뱉었다.
눈앞의 사람이 정녕 한 학원의 학생회장인 것인지 매번 의심가게 하는 행동들. 그리고 그것을 전부 전차장에 불과한 자신이 처리해야한다는 사실에 다시금 한숨이 입밖으로 새어나오길 반복했다.
만마전. 정식 명칭은 ‘판데모니움 소사이어티’.
게헨나 학원의 학생회이며, 대외적인 외교나 행정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집단.
자신은 그곳의 의원이자, 동시에 전차장이라는 직급을 지니고 있었다.
즉, 부회장도 뭐도 아닌 일개 의원에 불과했지만.
“아…….”
어느새 마코토 의장의 업무를 대신해서 처리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심지어 행정부 소속 학생들이 본래 마코토에게 가져갔어야 할 자료를 자신에게 들고오는 모습을 마주했을 땐 정말로 모든걸 놓고 싶어질 정도였달까.
“하아, 진짜 저런 멍청이가 우리 학원의 학생회장이라니 정말…….”
이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다보니 어느덧 이로하의 입에는 마코토에 대한 험담과 악평이 자연스레 쏟아지게 되었다. 마코토의 앞이든 뒤든 상관없이.
그럼에도 이로하가 지금껏 버텨올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그녀는 대답할 것이다.
“와아~ 이로하 선배다~!”
“이부키. 초콜릿이라도 먹고 오셨어요? 이리로 와요. 닦아드릴게요.”
“에헤헤. 고마워~”
만마전의 유일한 복지. 유일한 희망.
게헨나라는 마굴에서 피어나는 유일한 들꽃.
탄가 이부키.
눈앞에 있는 금발머리의 작은 소녀야말로 이로하가 지금껏 절망적인 업무를 버텨낸 이유임이라.
입가에 초코를 묻힌 채 베시시 미소짓는 이부키와 눈을 마주한 이로하는 저도 모르게 미소지으며 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부키의 입가에 가져다댔다.
그러자 이제는 이로하가 자신을 챙겨주는 것에 익숙해졌다는 듯, 고개를 쭉 빼낸 채로 눈을 질끈 감는 이부키.
피식하고 웃음을 흘린 이로하는 새심하게 이부키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스윽스윽-
“자, 다 됐어요.”
“응!”
어린아이의 순수한 감정이 느껴지는 대답이다.
이런 소소한 대화 속에서도 눈앞의 아이가 얼마나 순백하고, 착한 아이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말투.
이로하가 지금껏 만마전에 남아있는 이유 그 자체다.
그리 생각하며 이로하는 기특하다는 듯 이부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에헤헤, 간지러워~”
“후후. 오늘도 이부키 덕분에 힘이 나네요.”
“정말? 이부키, 이로하 선배의 도움이 됐어?”
“네. 정말로요.”
평온히 대답해주자 이부키의 눈동자에 순식간에 빛이 깃들며 환한 표정이 지어졌다.
그리곤 기쁘다는 듯 이로하의 품에 안겨들어 머리를 마구 비벼대는 것이 그녀가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였다.
이로하도 더 이상 참아내진 못했는지 이부키를 힘껏 껴안으며 자신의 상처받은 멘탈을 치유했다.
그렇게 서로 즐겁게 놀기를 잠시.
이부키가 돌연 깜빡했다는 듯 탄성을 내었다.
“아! 이로하 선배, 아지트 가야해!”
“아지트, 말입니까?”
거긴 왜?
“멋있는 언니가 이로하 선배 기다리고 있어!”
“……네?”
“노는 법을 알려달래! 그래서 이부키가 이로하 선배 데리러 온거야!”
이로하는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멋있는 언니? 노는 법을 알려줘?
이게 무슨 해괴한 이야기란 말인가. 그리고 심지어 자신이 아지트는 남들이 쉬이 알아채지 못하는 장소에 위치해있는데, 대체 누가?
‘사츠키나 치아키가 찾아온 것일까요? 아뇨. 그랬으면 이부키가 두 사람의 이름을 말했을테죠.’
그렇다는건 즉…….
“……외부인?”
이로하의 머릿속에 비상등이 켜졌다.
…
…
…
“하아…?”
“안녕하세요, 이로하 씨.”
이로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눈을 감았다 떠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 풍경.
새하얀 가면. 푸른 귀화가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 윤기 넘치는 백발. 그리고 손목에 장착된 정체 모를 영웅의 고유 장비까지.
현 시점 키보토스에서 제일 유명한 인물일 꼽자면 눈앞에 있는 이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아지트에 있었다.
“언니~ 이로하 선배 불러왔어~!”
“고마워요, 이부키.”
“헤헤. 그러면 나 초코 주는거야?”
“네, 여기요. 착한 이부키에겐 하나 더 드릴게요.”
“에헤헤! 멋진 언니 최고야!”
“…….”
이부키, 저를 초콜릿으로 파신 겁니까……?
거기다, 어린아이라지만 이부키가 초면에 저렇게까지 친근하게 대했던 사람이 있었던가요?
……아뇨. 그건 중요하지 않죠. 무엇보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를 먼저 파악하는게 중요합니다.
“실크, 당신이 왜 이곳에……?”
“아. 갑작스레 방문해서 죄송합니다. 잠시 이로하 씨에게 묻고 싶은게 있어서 말이죠.”
“……저에게, 말인가요?”
“네.”
그 영웅 실크가 나에게?
대체 무슨 질문을 할 셈이지?
“혹시 취미가 어떻게 되십니까?”
“……네?”
뭐야, 이거.
지금 나, 헌팅 당하는건가?
3.
“그러니까… 제대로 쉬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네.”
“…잠깐만요. 생각 좀 정리할게요.”
뭐지?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사실 다른 의미가 있는데 내가 이해를 못하는건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기라도 한건가?
아니, 쉬는게 쉬는거지 무슨 방법이 왜 있냔 말이다.
자신조차 대충 널부러져서 게임이나 과자를 씹으면서 시간을 떼우는 것이 유일한 쉬는 방식인데.
그걸 실크에게 가르쳐준다? 진짜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히 저 이유만으로 만마전에 찾아온건 말도 안되는데?
일각에서 얻은 정보로는 실크는 분명 선도부장과 친분이 있었다고 했어. 그런데 왜 우리 만마전에?
‘……진정하자.’
우선 천천히 대화를 하다보면 진짜 목적이든 뭐든 알 수 있겠지.
진심으로 쉬는게 무엇인지 알려주다보면 실크가 본색을 드러내거나, 진짜 이유를 알려주던가 하겠지.
그러니.
“으음. 그, 일단 알겠어요. 쉬는 법이라…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라 조금 놀랐네요.”
“괜찮습니다. 제가 너무 뜬금없이 찾아온 탓이니까요.”
이건 뜬금없든 아니든 상관없거든요?!
이로하는 이상한 말을 내뱉는 영웅의 모습에 정신이 참으로 아찔해지는 경험을 겪고 있었다.
화면 너머에서 볼 때는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직접 만나니 확실히 알겠다. 제정신은 아니구나.
“……우선, 제 취미라고 하면 일단은 독서이려나요. 그리고 게임이나 영화 감상도 나쁘진 않죠.”
“독서나 게임, 그리고 영화. 으흠. 알겠습니다.”
뭐지?
왜 진짜로 배우려는 느낌이지?
“……뭐든 휴식이란건 마음이 편안해야만 하는 것이니까요. 초조하고, 조급한 마음이 든다면 그건 휴식이라고 할 수 없는 법이죠.”
“오……. 그렇군요…….”
“그래서 저는 보통 이런 아지트에서 독서를 하거나, 낮잠을 자거나, 이부키랑 놀거나 한답니다.”
사각사각-
…이젠 아예 필기까지 하는 모습.
이로하는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며 순간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을 수 있었다.
…….
이젠 자신도 모르겠다.
어쩌면 정말로 쉬는 법을 배우려고 했던거 아닐까?
자신이 게헨나적 사고에 너무나도 갇혀있었기에 이 상황을 이상하게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이해할 수 없다면, 그냥 포기하면 편하다고 하던가.
지금 상황에서 참으로 옳은 말이었다.
‘이 참에 친절한 이웃이랑 친구나 먹죠, 뭐.’
상대방의 행동이 예측의 범주를 넘어서니 이로하는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래. 영웅이 쉬는 법을 몰라서 물어보러 왔을 수도 있지. 편협한 사고는 언제나 판단력을 해치는 법이다. 그러니 받아들이자.
이로하는 그리 생각하며 아지트에 드러누웠다.
그런 자신들을 곁에서 지켜보던 이부키도 해맑게 웃으며 자신의 곁에 눕는 모습. 귀여웠다.
“전 보통 이렇게 쉽니다.”
“아하.”
그런데…….
풀썩-
실크도 마찬가지로 눕는 모습.
“…….”
진짜 미치겠네. 이게 뭔 상황이지?
이로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괴상한 광경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
실크와 이부키가 눈을 감고 있다.
마치 잠이라도 자는 듯한 모양새였다.
‘설마, 방금 내가 눈을 감는걸 보고…?’
하하하. 이로하는 헛웃음을 흘렸다.
‘모르겠다.’
나도 잘래. 생각하기 싫어.
이로하는 포기하고 다시금 눈을 감았다.
그렇게 세 사람은 함께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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