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4
1.
판을 뒤집고, 바라는 방향으로 이끈다.
상담을 들어주었던 소녀가 떠올리고, 내가 받아들인 계획이었다. 내가 바라는 결말을 위해선 기존의 노선을 따라가선 안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보고 싶은 광경. 원하는 결말.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선 기존의 흐름을 부수고, 예정된 미래를 끊어내는 것이 방법이란걸 알았다.
그렇기에 아비도스로 찾아갔고.
그곳에서 카이저의 팔과 다리가 되어 움직일 헬멧단과 용역을 처치하였다.
아비도스를 괴롭히던 불량학생의 문제는 처리했다.
샬레의 선생과의 연결점도 내가 보낸 편지와 아비도스 측에서 보낸 편지로 이어지겠지.
메인스토리 해결을 위한 가장 큰 열쇠인 ‘선생’은 분명히 이번 사건에 개입할 것이다.
그리고 큰 문제나 변수가 없다면 선생은 학생들에게 최고의 결말을 선물해주겠지.
‘그 과정에서 많은 사고와 역경이 있겠지만…….’
선생은 끝내 아비도스를 구원할 것이다.
분명히 말이다.
…….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굳이, 비극을 겪고 난 후에 행복을 찾아야만 할까?
처음부터 고통을 겪지않는 방법은 없을까?
해피엔딩이란, 행복이란.
고통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얻는 산물이어야 할까.
한 악마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린다.
천국은, 지옥이란 과정을 통해 도달하는 궁극점.
모든 이야기의 결말이 행복하다면, 과정의 고통과 역경은 그저 시련에 불과하다는 결과론적인 이야기.
그때 나는 무어라 대답했던가.
“아니. 과정부터 행복해야만 진정한 행복이지.”
고개를 저었다. 그 사실을 부정했다.
판을 뒤흔들고자 결심했을 순간부터 떠올린 생각.
자격 있는 이들에게는 행복이 부여되야만 하고.
악한 이들에게는 엄벌과 심판만이 존재해야만 한다.
결과론적인 행복은 필요치 않다.
그저 행복은, 행복할 자격이 있는 이들에게만 부여되어야 한다. 악의를 품고, 탐욕을 품고, 타인의 가치를 멸시하는 이들은 심판 받아야 마땅하다.
이것이 내가 내리게 된 결론이요, 동시에 선택이다.
내가 정의의 대변인은 아니겠지만, 진정으로 만인을 행복으로 이끄는 ‘어른’의 존재는 알고 있었기에.
“나는 너희가 진정으로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러니─.”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너희를 지키겠다.
내가 너희의 자격을 증명하겠다.
그리고 동시에.
“너희의 실수를 바로잡겠다.”
나의 정체를 드러내서라도.
2.
아비도스를 떠나기 며칠 전, 나는 호시노에게 개인 모모톡을 보내 한적한 교실로 불러냈다.
“여- 히이로 쨩. 늦은 시간에 이 아저씨를 불러내다니, 아저씨랑 비밀친구가 되고 싶은거야~?”
“아, 오셨어요? 호시노 선배.”
“흐아암…. 한참 자던 도중이었는데…….”
여전히 나른한 말투와 행동거지를 한 채로 천천히 교실로 들어서는 호시노의 모습.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이 풀리도록 만드는 게으른 소녀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겉으로 보면 귀엽기만 한데 말이야.’
하지만, 나는 안다. 정확히는 ‘직감’을 느꼈다.
‘살벌하네.’
전신이 저릿할 정도로 느껴지는 위험.
그녀의 저 나른한 말투와 행동거지 아래에 나를 향한 경계심과 의심이 지뢰처럼 숨겨져 있었다.
내 직감이 반응할 정도로 격한 경계심이 말이다.
그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처음부터 보여주었던 나른하고, 풀어진 모습.
그 모든 것들이 연기였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아니, 전부 연기는 아니겠지.’
내가 실제로 아비도스를 위협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과 그녀들에게 진심을 드러내었던 순간, 호시노에게 느껴지는 경계심이 크게 누그러졌음을 느꼈다.
다만, 이 늦은 시간에 그녀를 홀로 불러냈다는 사실이 다시금 그녀의 경계심을 깨운 것이리라.
“그래서 무슨 일일까나, 히이로 쨩?”
지금도 보아라.
몸으로는 나른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나를 바라보는 오드아이 눈동자로는 탐색을 하고있지 않은가.
내가 무슨 이야기를 꺼내냐, 에 따라서 그녀는 이제부터 나에 대한 대응을 다르게 할 터.
그러나 나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내가 할 일은, 진심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선배. 그리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으응? 무슨 소리야~?”
“정확히는, 경계하실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 히이로 쨩, 무슨 말을-”
탁-!
나는 품 속에서 어떤 물건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다놓았다. 그리곤 호시노의 반응을 살폈다.
“…어?”
예상대로 호시노는 놀란 눈빛을 품으며, 게으른 행동 연기마저 잊어버린 채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경악은 물론이요, 부정과 환희라는 공존하기 힘든 감정이 스쳐지나갈 정도였다.
왜냐하면,
“이제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 호시노 선배.”
내가 책상에 올린 물건은 ‘실크의 가면’이었기에.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에 당황한 호시노는 연기마저 잊어버린 채 내게 물어오기 시작했다.
“네가, 히이로 네가 ‘실크’였다고……?”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책상 위 가면을 가져와 얼굴에 착용했다.
포니테일로 묶었던 머리를 풀고, 겉옷을 벗어 이제는 꽤나 세간에 알려진 히어로 슈트를 드러낸다.
가면 ‘비전’의 전원을 키자, 모두가 기억하는 푸르른 귀화가 타오르는 안광이 가면의 눈가에 새겨진다.
그리고 이어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말을 꺼냈다.
“서프라이즈입니다, 선배.”
이내 흘러나오는 것은, 키보토스의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 ‘실크’의 목소리.
기존의 히이로와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변조된 목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호시노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미친.”
“하하하! 깜짝 놀라셨습니까?”
“당연하잖아……!”
완전히 표정이 풀려버린 호시노를 바라보며 미소짓자 호시노 또한 순식간에 경계를 풀어내고 미소를 지어보이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주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얼굴에 마른 세수를 반복하는 호시노.
이내, 얼굴에서 손을 떼어낸 호시노가 입을 열었다.
홍당무처럼 새빨간 얼굴로.
“히이로 쨩. 방금 본 것들 잊어주지 않을래……?”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잊어달라고.
호시노는 히이로에게 애원했으나, 히이로는 그저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
…
…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거야?”
“어라, 이제 연기는 안하십니까? 호시노 선배?”
“……. 무, 무슨 이야기를 하고싶은 걸까나~ 우리 히이로 쨩은……?”
“푸흣! 으하핳! 큭큭큭! 아, 죄송해요! 큭큭!”
“으응…. 아니야…….”
애써 주제를 돌리려다 내가 놀리기 시작하자 다시금 부끄러움이 몰려오는지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이는 호시노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내게 화를 낼 수도 없었는지 애써 속으로 진정하려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죄송해요. 처음부터 경계하시길래 조금 무서웠는데 호시노 선배의 이런 모습을 보니 조금 즐거워서 그만. 용서해주세요. 네?”
내 변명에 대답할 기력도 없는지, 호시노는 애써 미소지은 채 눈빛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나는 그녀의 바람대로 대답하기로 했다.
잠시 벗어두었던 가면을 다시 쓰면서 말이다.
“좋아요. 제가 할 이야기는-”
하나의 경고이자, 가르침.
이것은 나나시 히이로가 아닌, 실크의 신분으로 건네는- 그녀의 미래를 바꾸기 위한 포석이었으니.
“호시노 선배.”
입가에 떠올린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모습을 드러낸다. 말투, 표정, 그리고 기세마저 뒤바꾼다.
순식간에 돌변한 분위기에 호시노마저 놀란 눈빛을 품을 정도로 나의 모든 것이 역변하였다.
나나시 히이로와 달리, 영웅인 실크가 건네는 말의 의미와 무게를 실감하라는 듯이.
“히이로 쨩, 갑자기 왜-”
“실크로서, 당신에게 경고를 드리겠습니다.”
“……경고?”
풀어냈던 분위기를 다잡고, 진중한 모습을 비춘다.
이는 연기였다. 호시노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한 연기, 그리고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한 연기.
그럴 듯한 모습. 이해할 수 없는 모습.
더 나아가.
“당신의 희생으로 친구들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세요.”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의미심장한 모습으로.
“그게 무슨 말이야, 히이로 쨩……?”
호시노의 질문에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면을 벗으며 그녀에게 미소지을 뿐이었다.
순식간에 풀려나는 분위기와 무게감.
가면을 벗고 난 후에 남아있던건 평소처럼 아름답고 털털한 분위기에, 애교가 많은 귀여운 후배 뿐이었다.
이중인격이라 해도 무방한 변화에 호시노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고, 나는 그제서야 답해주었다.
평소와 같은, 해맑은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말 그대로의 의미에요, 선배. 잘 기억해주세요.”
그러니 부디.
이 대화가 당신에게 가치가 있기를.
나는 속으로 기도했다.
3.
아비도스가 결과적으로 파국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모두가 함께여야만 가능하다.
다른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희생한다, 와 같은 멍청한 선택은 절대로 있어선 안된다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호시노에게 접근했고, 경고했다.
몇 년 전부터 검은 양복에게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던 호시노다. 앞으로 상황이 어려워진다면 자신이 희생하여 사랑스런 후배를 지키겠다고 선택을 내리리라.
그 선택이 잘못된 것인줄도 모르고 말이다.
때문에 막았다. 내가 개입하여 가능성을 지웠다.
완전히 지워지진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호시노는 내가 건넨 경고의 말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생각하리라.
이걸로 호시노가 희생하는 운명은 막은 것일까?
아비도스가 파멸하는 미래를 비튼 것일까?
“아니. 이걸로도 부족하지.”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면 판을 부수어라.
내가 세웠던 계획의 주제와도 같은 것.
그를 위해서 카이저의 정보를 언론에 뿌렸고, 아비도스를 찾아가 인연을 쌓았으며, 호시노에게 경고를 남겼다. 그럼에도 난 아직 부족하다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난 카이저라는 불꽃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고 그들은 야망을 이루고자 움직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아비도스의 파멸을 막고자 기존의 이야기를 비틀고 미지의 적을 만든 셈이 되었다.
이제부터 벌어질 일들은 내가 예상할 수 없는 변수로 가득한 혼돈일 것이다.
사전에 알고있던 정보를 이용하고, 인연을 쌓고, 고작 약간의 변수를 창출했다고 만족해서는 안된다.
이 상황 속에서 내가 원하는 결말을 만들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앞서나가 수를 읽고, 대비해야만 했다.
“왔구나. 이때 쯤이면 올 거 같기는 했지.”
다만, 어떨 때에는 하늘에서 행운이 툭 하고 떨어지는 순간도 있는 법이라 했던가.
“어머. 후후후, 저를 그렇게나 기다리셨던 건가요?”
“기다리긴 했지. 약속했었으니까.”
“……그래요. 그렇지요. 당신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아직도 제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천둥과 같으니까요”
“으음. 그래. 여전히 광기가 넘치는구나.”
“후후, 당신께서 제 눈에 담아주신 애정이지요.”
아비도스에서 집으로 돌아온 날,
집 안에 있는 무단침입자를 보고도 내가 느낀 것은 분노나 당혹감보단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었다.
눈앞의 소녀는, 이젠 적이 아닌 아군에 가까웠으니.
“당신을 만나기 위해 이렇게 찾아왔답니다?”
“오랜만이야, 와카모.”
코사카 와카모.
과거에 빌런이었던 그녀가 찾아왔기에.
하지만 나는 그녀와의 재회에 기뻐할 겨를도 없이 그녀를 보자마자 한 가지 제안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와카모,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이런 말을 해서 정말로 미안하지만… 잠시 도와줄 수 있겠어?”
“…….”
“와카모? 왜 그러-”
“하아, 난처하네요…. 당신께서 저를 필요로 해주신다는 말을 듣자, 행복이 흘러넘쳐버릴 것만 같아서…. 당장이라도 당신께 안기고 싶어진답니다?”
“…어, 음. 일단 진정 좀 해봐.”
어어. 왜 이러는거야.
어째선지 달뜬 숨결을 내뱉으며 천천히 다가오려는 와카모에 모습에 나는 뒷걸음질치며 말했다.
“부탁할게. 한번만 도와줘.”
“원하시는 것은, 뭐든지 말씀해주세요. 네, 뭐든지♡”
“그, 고맙긴 한데 거리감이 너무 가까운거 아니냐?”
순식간에 제안을 받는 와카모.
아니, 말하는걸 들어보면 내가 뭘 말하든 다 들어줄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대체 왜 이러는거야.
“저는 이미 당신께 제 몸과 마음 모두를 바치기로 결심했으니까요. 그러니 책임져주세요, 실크.”
“…….”
나는 이 순간을 이렇게 표현하고자 한다.
행운이 눈앞에 나타났다.
다만, 살짝 집착이 심한 행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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